얼마 전 뉴스에서 "검사장 급 검사"에 관한 이야기를 보았다. 검찰청 조직은 검찰총장과 검찰로 이원화 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검사장"이나 "검사장급"이란 표현이 언론 등에서 관행적으로 널리 쓰인다고. 법적 근거도 없다는데, 여전히 검사장급 검사는 비공식적으로 차관급 예우를 받는다고한다.   


어느 조직이나 사회에서도 이처럼 구별짓기 관행은 존재하는 것 같다. 이민자의 나라인 호주. 코카시안 호주인들의 눈에는 다 똑같은 외국인처럼 보이겠지만, 한인들 사이에는 "검사장급" 검사들 처럼 나름의 위계가 존재한다. 그 위계의 최상층에 소위 "영주권자"로 불리는 이들이 있다.


https://pixabay.com/en/passport-document-traveling-576913/


어느 나라나 그렇지만, 외국인이 일정기간 그 나라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비자라고 불리는 이민 서류가 필요하다. 호주에도 관광비자, 학생비자, 단기숙련 비자 등 여러 종류의 비자를 소지한 한인들이 체류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영구거주 비자 소지자는 영주비자 소지자라 부르지 않고 영주권자로 부르는 관행이 있다. 


검찰의 꽃이라는 검사장이 되기 위해 많이 검사들이 노력하는 것 처럼 호주에 체류하는 많은 이들이 비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영주비자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난 10년 동안 내 주변에서도 그 "꽃"을 얻기 위해 몇 년을 고생하다 갑작스럽게 변경된 이민법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한국행을 택한 분들이 적지 않다.


소수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호주에서의 임시 노동이나 학업이 영주비자 획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내 주변을 보더라도 그 비자를 받기 위해 한국에서 받은 대학졸업장보다 더 낮은 학위를 다시 받고, 본인의 전공이나 경력과 관계 없는 분야에서 몇 년 씩 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처럼 쉽지 않은 길을 걸어 마침내 얻은 비자이니 그 성취감은 두 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주권자"라는 관행적 표현은 고생 끝에 비자를 다른 임시거주 비자와 구별짓고 싶은 욕망의 발현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비자를 받기위한 개개인의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런데, 이런 구별짓기에 대한 욕망은 앞서 말한 것 처럼 이곳에 체류하는 이들 사이에 가상의 위계를 만들기도 하고, 그 위계를 공고화하기 위한 여러가지 담론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호주 거주 한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인터넷 카페에 어떤 회원이 올린 웃픈 일화가 있다. 글쓴이가 어떤 커피숍에 갔는데, 옆 테이블에서 한국인들이 호주내 한인들의 위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내용인즉,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는 노비, 학생비자 소지자는 평민, 457비자 소지자는 6두품, 영주비자 소지자는 진골, 시민권을 취득한 이는 성골이라고. 


물론, 현실에서 "너 노비, 나 진골" 이러는 경우는 없지만, 이런 가상의 위계에 기초해 상대방을 평가하고 관계를 맺는 등의 일은 비일비재하다. 내가 "평민" 시절, 막 "진골"로 올라선 지인은 내 앞에서 "워킹 온 애들한테 잘 해줘봐야 1년 지나고 가버리면 남는 것도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곤 했다. 나와 별 허물 없는 사이였고, 내 비자는 워킹홀리데이 보다 훨씬 긴 4년이라 별 거리낌이 없었던 것일까? 물론, 그 말이 그다지 편치는 않았지만, 1년 후면 소원해지는 인간관계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 정도로 생각하고 넘겼다.


'영주권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때가 되면 받겠지'라고 자못 대범했던 어떤 지인은 주변인들이 하나 둘 영주비자를 받는 모습에 초조했는지 어느날 갑자기 RSMS(지방후원 영주비자)를 받겠다며 두 시간 남짓 거리의 작은 지역으로 떠나버렸다. 나중에 비자를 받고 나서 말하길 본인만 영주비자가 없으면 함께 못 만날 것 같아서 그리 했다고. 그 때도 계속 학생비자 소지자였던 나는 뭔가 아리송했지만, 그 이후로 그 지인과의 만남이 뜸해진 걸 보면 무슨 의미였는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ㅎㅎ


한인 커뮤니티에서 광고를 보면 종종 "영주권자 이상"이란 표현이 나온다. "영주권자 이하"의 존재를 염두에 둔 이 표현 역시 가상의 위계를 잘 보여준다. 특정 비자의 보유 여부를 묻는 것이라면 단순히 "영주권 보유자" 정도로 해도 좋을 것을 굳이 "이상"이란 표현을 통해 사람을 이상과 이하로 나누는 것은 뭔가 슬프지 않은가? 이정도면 누군가는 나를 '프로 불편러'로 부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비자 문제로 국내 추방될뻔 한 한인 가족에 대한 뉴스가 호주내 한인언론에 실린 적이 있다. 각종 이민사기로 인해 영주 비자를 받지 못하고 호주에 오래 거주한 가족인데, 이민장관에게 보낸 청원이 두 번이나 거절되어 한국행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지역 국회의원과 교회의 노력, 그리고 교민을 포함한 시민들의 청원으로 한 번 더 심사를 받게 되었고, 마침내 영주비자를 받게 되었다는 뉴스였다. 그런데 이후 호주 한인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이 가족들의 행동을 '법과 규정을 초월한 언론플레이의 성공'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댓글들이 여럿 올라왔다. '고생해도 못 받는 사람도 널렸는데, 본인들 잘못으로 못 받은 것을 언론플레이를 통해 떼를 써서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 호주 교민사회에 존재하는 가상의 위계와 그 위계의 상층부에 다다른 이들의 사다리 걷어 차기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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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두리

잡생각의 편린 2017. 7. 8. 00:37

블로그에 마지막 글을 쓴 지 몇 년이 지났다. 그리고 오랜만에 기나긴 정적을 깨고 몇 자 끄적여 본다. 며칠 전 우연한 계기로 내가 예전에 이러이러한 블로그를 시작했다가 학교 일 때문에 바빠서 개점휴업 상태란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했다. 그것이 계기였을까? 떠나온 지 몇 년 만에 고향을 찾는 마음으로, 조금은 더 어렸던 그때의 내게 대화를 건네는 마음으로 별 볼일 없는 이 공간을 들여다본다. 


서는 위치가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고 했던가. 불과 몇 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때 포스팅한 잡글들이 우스워 보인다. 누구에게 거는 대화인지 알 수 없는 잡동사니 포스팅을 몇 개 읽다 보니 알 수 없는 부끄러움마저 느껴진다. 삭제할까 싶은 생각이 들다가 유치한 공명심도 내 삶의 일부였구나 기억하게 그냥 남겨두련다.


어쩌면 관계지향적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고픈 욕구가 내 내면에 움트던 시기였던 것 같다. 초중고를 지방 소도시에서 보낸 내게 인간관계란 늘 물리적 시공간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로 인식되곤 했다. 친한 친구는 집 근처에 사는 친구였고, 학교에선 앞 뒤 옆에 앉는 친구였다. 물론, 내 친구들도 대부분 이런 식으로 시공간적 근접성이 대부분의 친소관계를 규정하는 주요 요소였던 때였다.


4학년 2학기 때 시골의 작은 분교에서 시내의 비교적 큰 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리고 그것이 어린 시절 내가 처음으로 겪었던 관계의 단절이었다. 학년이 올라가고, 중학교에 입학하고, 다음은 고등학교로...... 나이가 하나 둘 많아지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커다란 학교 운동장이 작아진 듯한 착각을 하곤 한다. 이렇게 내가 인식하는 시공간의 범위도 점점 확대되어 갔지만 여전히 동일한 시공간을 공유하는 것은 내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였던 것 같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늘 함께일 것 같은 좋은 친구와 나를 묶어 주던 시간과 공간이 유한한 것임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때로는 그 유한함이 야속하고 슬펐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그 시간과 공간을 재생산하려는 노력도 많이 했다. 그 시간과 공간을 함께 했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 "하나" 따위의 조금은 유치한 서사를 동원해 그 관계를 부여잡고자 했던 기억도 참 많았다. 열아홉을 넘어 스무 살 대학이란 공간과 시간으로 내 삶이 옮겨 갔을 때도 십 대란 시공간을 공유했던 이들과의 관계 유지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 보면 그런 '관계 집착자'의 애절함이 많은 이들에겐 폭력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다 크고 나서야 들었다. 함께 했던 시공간을 재생산하는 애틋한 노력에 에너지를 쏟기 어려웠던 친구들에게 "단합"이니 "동기사랑"이니 하는 언어가 얼마나 폭압적이었을까?


반이민자 생활도 십 년이 된 듯하다. 가만히 있어도 나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친구로 규정해 버리는 것이 어쩌면 무례할 수도 있는 시간과 공간에 있다. 그래서 내 이십 대 대부분의 시공간을 공유했던 한 친구가 나처럼 남반구의 작은 도시에서 정착했다는 것이 내겐 일상의 작은 위안이 되곤 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 "위안"이란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내게만 위안이고 상대에겐 불편함이었나 보다. 녀석은 어쩌면 이 새로운 시공간에서 재회한 우리의 관계를 과거가 아닌 현재의 맥락에서 새롭게 규정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8천 킬로나 떨어진 그곳의 15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들을 오늘의 이 자리로 소환하는 내가 불편했던 것 같다. 지난 네 달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작은 넋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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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신자가 아닌 내게 교황의 방한이 의미있게 다가오는 것은 단순히 내가 그의 주요 동선 가운데 한 곳인 서소문 근린공원의 근처에 머물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동북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살고 있는, 카톨릭 신자도 아닌 나 조차도 그의 공식적인 일거수일투족을 하루가 멀다하고 전해 듣고, 볼 수 있는 것은 다름아닌 미디어의 힘일 것이다. 얼마 전에는 스마트폰과 SNS에 현대인들이 무의미하게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고 말씀하신 교황님의 (정확히 말하자면 교황청 SNS담당관이겠지만...) 공식 트위터 계정은 내가 본 것만 8개에 달하고 팔로워 수를 다 더하면 천 만도 넘어 보였다.


교황의 발언과 행동은 오늘과 같이 인터넷과 SNS가 보편화되기 전에도 신문, 방송과 같은 전통적 미디어를 통해 큰 파급력을 보여왔다. 언론과 민주화의 관계를 다루는 어느 논문을 보면 칠레의 권위주의 하에서 급격히 위축되었던 언론들이 교황의 방문과 그가 던진 메시지를 실시간으로 보도함으로써 (아무리 군사정부라도 교황생중계를 막을 수는 없었으니)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키우고, 언론의 자유도 함께 커지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권위주의 하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한국 민주화에 미쳤던 영향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겠다.


의전상으로 국가원수급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사회적 담론에 미치는 교황의 영향은 다른 어떤 국가 원수의 방문 보다 더 크다고 하겠다. 일반적인 국가원수의 방문은 해당 국가와 한국의 국익을 놓고 벌이는 외교전의 성격이 강하지만, 교황의 방문은 종교 수장이라는 그의 위치 덕분에 '갈등의 치유', '보편적 인간애의 강조' 등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적어도 교황님이 무슨 '자원외교'를 하러 온다라는 식의 인식은 없으니까). 


교황의 방문은 소위 공식일정이라 불리는 가시적인 부분과 그 뒤에 존재하는 (혹은 반도의 국민들에 의해 해석될) 비가시적인 부분들이 복합적으로 존재한다. 당연히 그 비가시적 부분을 두고 담론의 대결이 펼쳐질 것이다. 앞서가는 언론에서는 이미 '사대주의' 담론을 들고 나왔다. 교황께서 고통 받는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현정권을 애둘러 비판하길 바라는 시민들과 그런 의견을 전하는 언론들에게 미리 한 방을 날린 셈이다. 


그가 무슨 말을 남길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 말씀이 너무나 넓고 고귀하며 자명한 것이어서 담론의 장에 있는 누구라도 자신들에게 듣기 좋은 쪽으로 해석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방문이 끝나고 나면 그가 던진 화두를 두고 한 차례 의미투쟁이 시작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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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피아란관료와 마피아의 합성어. 정부 부처의 관료가 퇴직한 뒤 관련 기업에 전관예우로 재취업하는 유착 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각종 납품 비리나 대형 사고로도 이어지며 부패의 고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마피아로 비유된다 (2014.4.24 중앙일보)


세월호 사고 이후 '관피아'라는 말이 끊임없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처음 언론에서 쓰인 것이 언제인가 네이버 뉴스 검색을 해 본 결과 4월 24일자 중앙일보 기사로 나타났다. 불과 한 달 여 사이에 4천 건 이상의 뉴스에서 '관피아'를 언급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을 보면 세상을 등지고 사는 자가 아니고서야 그 말을 한 두 번 들어 보았음직 하다. 


유관기관에 취업한 퇴직관료들이 관행적으로 저지른 부정부패와 안전불감증이 세월호 사고의 큰 원인 가운데 하나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에 따라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 및 처벌은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언론에서 만들어낸 '관피아'란 말은 문제의 핵심을 명료하게 짚어주지만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관피아'란 말은 그 대상을 잠재적 범죄인으로 간주한다. 현 시점에서는 세월호 사고에 책임이 있는 해수부 출신의 특정 인사들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없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 말은 분명 실질적인 부정부패와 관련없이 '관련 기관에서 근무하는 전직관료'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표현이 될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오늘 자 동아일보를 보면 정부통계를 통해 알아본 "관피아 현황"이라는 그럴싸한 기사에 관료출신으로 유관기관에서 일하는 수 백 명의 명단을 올려 놓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댓글을 보니 예상대로 그 명단이 마치 부정부패자 리스트라도 되는 냥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동안 보고 느낀 한국 사회의 현실을 감안하면 그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이 실제로 크고 작은 부정부패에 연루되었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 할 지라도 전직 관료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욕을 먹고 언론에 이름 까지 오르내려야 할 이유는 없다. 


'관피아' 문제의 핵심은 전관예우와 내부 고발을 터부시하는 한국 문화이다. '관피아'라는 말은 그 핵심을 흐리고 재취업한 전직 관료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비단 전직 관료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문제는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 언론인 출신이 기업의 홍보담당 임원으로 옮겨가 스핀닥터 역할을 하는 것이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기자가 퇴직하고 기업으로 이직하는 것 자체를 나쁘게 보면 안 되는 것처럼, 어떤 분야에서 오랜 경험을 가진 퇴직 관료가 관련 기관으로 재취업 하는 것 자체를 문제인 것 처럼 호도해서는 안된다. 


'관피아'란 말의 문제점은 보수언론에서 유행시킨 '귀족노조'란 말 처럼 맥락이 거세된 채 특정집단을 지칭하는 말로 쓰일 가능성이 농후하고, 실제로 이미 그렇게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귀족노조' 같은 경우에는 그 표현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노조 활동가들 그리고 그들과 유사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그 표현의 부당성이 끊임없이 제기될 수 있지만, '관피아'는 그럴 것 같지 않다 (그 표현을 문제 삼는 사람은 아직 조갑제 씨 한 명 밖에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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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또 한 번 논문 표절로 시끄럽다. 유명 국립대학 교수가 논문 표절로 사퇴했고, 독설로 유명했던 스타 강사가 방송에서 하차했다. 표절 의혹을 받은 한 인기 연예인은 바로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신정아 사건으로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논문 표절은 고위 공직자의 청문회 과정의 단골 검증 메뉴로 자리잡았다. 의혹을 받은 후보자들이 낙마하기도 했고, 현직 의원이 탈당했다. 표절에 관한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변화다.


의혹의 당사자들은 과실을 인정하는 한편 어쩔 수 없는 측면에 대해서는 항변하기도 한다. 일과 학업을 동시에 하면서 엄밀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인정하기도 하지만 국내에 표절 의혹에서 자유로운 석사 논문이 과연 얼마냐 있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논문 의혹이 불거지면 대학은 언제나 연구 윤리 강화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윤리적 측면을 보강한다고 표절할 사람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긴 힘들다.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도 높은 학위를 날개로 생각하는 것이 학벌 중심 사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들 말대로 본업과 학업을 동시에 진행하며 촉박한 시간에 좇기면 어떤 윤리적 측면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표절의 유혹에서 자유롭기 힘들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표절한 것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학위논문 이후엔 더 이상 논문을 쓸 필요도 의사도 없는 이들에게 똑 같은 학위수여 기준을 적용해 의무적으로 논문을 쓰게 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재고해 볼 필요는 있다.



호주 대학원은 수업만으로 학위를 받는 과정과 논문만으로 학위를 받는 과정이 별도로 존재한다.



호주의 이원적 대학교육 시스템은 이런 측면에서 한국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호주의 대학원은 수업과 과제 및 시험으로 이루어진 코스웍’(Course Work) 과정과 연구 및 논문 작성을 하는 리서치’ (Research) 과정이 있다. 코스웍 과정은 졸업 후 취업을 목표로 하는 경우, 리서치 과정은 연구 및 교육 분야에서 일하고자 하는 경우에 지원한다.


현업에 종사하면서 좀 더 높은 학위를 받고자 하는 경우 대게 코스웍 과정에 지원한다. 일부 전공에는 코스웍 과정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 전문박사 과정’ (Professional Doctorate)도 개설되어 있다. 연구와 논문 보다 이론과 학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찾는 과정이다.


대학원 과정의 이원화는 유명인의 논문 표절 시비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동시에 연구 과정에 대한 엄격한 관리를 통해 예비 연구자들의 논문의 질도 재고할 수 있다. 나아가 성실한 학생들 조차 잠재적 표절자로 동일시되는 자괴감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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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꾼다는 것은 그 슬로건의 주인이 대선 후보를 열망했던 것 만큼 간절하지만 이루기 어려운 소망이었을까? 

<그림: http://blog.daum.net/main-consulting/5145036>


전쟁과 가난을 직접 경험하고 극복한 부모님 세대 덕분에 우리들은 '보릿 고개'를 경험이 아닌 학습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삼시 세끼를 챙기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현실을 생각하면 문자 그대로의 '저녁이 있는 삶'은 이미 오래전에 이루어졌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저녁이 있는 삶'을 갈구한다. 그건 바로 우리에게 '저녁'이 더 이상 우리 생활에 필요한 1,000 킬로칼로리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수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저녁'은 함께하는 육아를 의미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겐 연인과 함께하는 데이트일 수도 있다.


11월 21일 오늘은 호주의 '칼퇴근 날' (National Go Home On Time Day)이다. 호주에 사는 한국인들이 보면 천인공노(?) 할 수도 있다. 마감 시간 전에 이미 셔터가 절반 쯤 닫힌 상점이나, 더 이상 방문객을 받지 않는 각종 기관을 늘상 지켜본 우리에게 호주인이 칼퇴근을 운운한다는 것이 어이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각종 통계수치까지 내걸고 호주인의 과잉업무를 지적하는 주최측의 모습은 자못 결연하기까지 하다. 


<그림: http://www.gohomeontimeday.org.au>


물론, 여기서 호주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이 OECD 평균인 1,749시간에도 못 미치는 1,587시간이란 점을 공개해 그들을 민망하게 하고 싶진 않다. 나아가 2,193시간을 일하는 한국인과 비교할 생각도 없다. 분명한 것은 통계에도 불구하고 OECD 평균 노동시간을 상회하는 노동자들이 호주에 존재할 것이란 점이다. 

우리는 종종 "배부른 소리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호주의 '칼퇴근 날' 처럼 '배부르고 염치없는' 주장과 생각을 통해 사회는 더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삼시 세끼 챙기는 것이 어렵지 않을 만큼 '잘 산다는' 나라,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라 자부하는 나라에서 '저녁이 있는 삶'은 당연한 '배부른 소리'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부모님 세대가 우리 세대에게 삼시 세끼를 선물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면, 이젠 우리가 다음 세대의 '저녁'을 위해 밤낮으로 '배부른 소리'를 해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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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리즘

잡생각의 편린 2012. 10. 29. 23:09

Vandals have painted the word "tyrant" and the radioactive symbol on Campbell Newman's electorate office window.

<Photo: Brisbane Times>


  공공시설물 훼손 행위를 뜻하는 반달리즘(vandalism). 호주에 살다보면 공공의식이 뛰어난 나라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길을 가다 훼손된 공공시설물을 자주 보게되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된다. 위 경우는 일반적인 반달리즘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위 신문의 사진을 처음 볼 때 아마도 나 처럼 "쥐20" 사건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공공 시설을 정치적 반대 의견을 개진하는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블라이 전 수상의 노동당에 엄청난 정치적 타격을 입히며 혜성처럼 등장한 캠벨 뉴만. 하지만 집권초의 반사적 지지율도 공공부문 정리해고, 부적절한 예산 삭감 등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이번 공격은 최근 단행한 우라늄 광산 개발 재게를 반대의 표현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문은 제법 담담하게 기사를 적고있다. "뉴만의 사진에는 콧수염도 그려져 있다"는 문장에선 피식 웃음도 났다. 인터뷰를 한 사람은 "별로 놀랍진 않지만 멍청한 짓"이라며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답했다.


반면, 댓글은 역시 브리즈번 타임즈 독자라 그런지 칭찬(?) 일색이었다. 


  "전혀 놀랍지 않네. 사람이 자꾸 구석으로 밀려나면 이런 일이 생기지"

  "독재자라는 타이틀은 어울리는데, 콧수염은 가당치 않군"

  "난 사실 이런 뉴스를 기다렸어"

  "난 사실 그래피티 싫어하는데 이건 좋네. 후손을 위해 보존할 수 있을까"


표현의 자유, 정치적 비판의 자유는 누르면 튀어오른다는 것은 어느 곳에나 적용되는 사실인 듯 하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집권당에서 낸 논평이다. "이런 행위는 주민들의 세금만 축 낼 뿐이다"


국격, 국가 수장에 대한 모욕 등의 논리보단 '세금' 논리가 훨씬 세련되 보인다^^  

Posted by 세월부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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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 일 등교길 라디오에 케빈 러드가 자주 발언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호주의 UN 비상임이사국 가입에 관한 의견에서 시작해 호주 정치의 정책 실종에 관한 비판 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긴축 정책 - 둘째 자녀의 베이비 보너스 삭감, 대학 연구비 축소 등 - 이 '길라드 광산세'가 예산을 충족시킬 만큼 많이 걷히지 않는 것에 기인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는 듯 보인다. 


야당은 광산세가 현 정부가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예산안은 물론이고 지금 집행하고 있는 부분 조차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자연스럽게 케빈 러드가 실시하려다 초국적 기업들의 압력으로 실패한 (이름에서 왠지 모를 포스가 느껴지는) 'Resource Super Profits Tax'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 같다.


러드의 귀환... 과연 성공할 수 있을 지 궁금해진다.  

Posted by 세월부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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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장애인 올림픽'으로 불리는 패럴림픽은 그리스어인 'para' (나란히, 옆)와 'Olympic' (올림픽)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조어이다. 올림픽이 종료된 뒤 개최 도시에서 '나란히' 열린다는 의미이다. 


런던올림픽이 끝나고 지난 8월 30일부터 패럴림픽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올림픽 소식으로 가득했던 인터넷 포탈과 언론사 '닷컴'에서 관련 기사를 보는 것은 쉽지 않다. 지레짐작이지만 패럴림픽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패럴림픽에 가장 무관심한 나라로 지목된 북한의 유일한 참가 선수 (사진: News.com.au)



나 역시 지금 한국에 있었다면 패럴림픽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나마 이곳 호주 언론에는 패럴림픽에 관한 기사가 자주 올라오는 편이라 경기가 진행 중이란 사실만 넌지시 알고 있을 뿐이다. 


한 언론에서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고 각 국가별로 얼마나 패럴림픽에 열과 성의를 다하는 지를 평가해 '부끄러움과 명예 지수'(Shame and Fame Index)를 발표했다. 0에서 10으로 이루어진 이 지수가 높을수록 패럴림픽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국가라는 의미이다.


먼저, 가장 적은 관심을 보이는 국가로 북한(0점), 미국(2점), 일본(4점), 헝가리(4점), 이탈리아(5점)가 지목되었다. 이 국가들의 공통점은 런던 올림픽에서 거둔 성적에 한 참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비단 금번 패럴림픽 뿐 아니라 과거에도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경우 올림픽 중개를 했던 NBC가 단 한 번도 실황중개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지적 받았다.


한편, 높은 점수를 기록한 국가는 개최국인 영국(10점)을 비롯해 호주(9점), 중국(8점), 우크라이나(8점), 나이지리아(7점)가 선정되었다. 나이지리아의 경우 올림픽에선 단 한 개의 매달도 획득하지 못했지만 패럴림픽에서는 현재까지 11개의 매달을 획득했다. 


평가를 실시한 언론 조차 중국이 높은 점수를 받은 것에 놀라움을 표했다. 중국 수영팀의 장홍구(张鸿鹄) 코치는 인터뷰에서 "중국 정부와 인민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것이 패럴림픽 선수들에게 높은 수준의 체계적인 훈련을 보장한다"고 밝혔다. 말의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중국이 장애인 선수들에게도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겠다. 



호주의 패럴림픽 공식웹사이트

 

이 평가에서 9점을 기록한 호주는 이번 대회를 포함해 지난 두 번의 대회에서 모두 5위의 성적을 기록했다. 호주 공영방송인 ABC는 100시간 이상을 패럴림픽 중개에 할애하고 있다. 정부 역시 지난 4년 간 패럴림픽 선수단에 4천 5백만 호주 달러(약 5백억원)를 지원했다. 


사회적 소외 계층을 위한 적은 복지 예산 조차 국회에서 삭감해 버리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대비된다. '공공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복지논쟁이 단순히 선거 전략이 아니라 소외된 계층을 위한 공공성의 발로이길 기대해 본다.  


(참고로 대한민국은 현재 패럴림픽에서 18위를 기록 중이다. '부끄러움' 국가에 선발되지 않은것이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Posted by 세월부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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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나라로 불리는 일본에 비하면 호주는 여전히 한국에게 '멀고도 먼 나라'임을 부정하긴 힘들 것 같다. 그래서 가끔씩 언론에 등장하는 호주 이야기도 소위 '해외토픽'이란 코너에 어울리는 내용들이 보통이다. 악어 이야기, 고래 이야기, 캥거루 이야기...ㅎㅎ


한호 수교 50주년이 지났지만, 호주에게도 여전히 한국은 먼 나라임에 틀림 없다. 김치의 나라, 태권도의 나라... 그리고 국회의원들이 의사당에서 태권도를 하는(?) 나라 정도... 그 외에 '코리아'는 대게 북한에 관한 기사 일색이다. 


그런데 최근 호주 언론 하나가 대한민국을 제대로 낚는 기사로 화제인가 보다. 브리즈번의 MX라는 신문에서 올림픽 메달 순위를 보여주는 표에서 남한을 'Nice Korea' 북한을 'Naughty Korea'로 적은 것이다. 


한국 기사 내용을 제대로 보진 않아서 국내에선 이를 어떻게 바로보는지 잘 모르겠지만, 대충 예상해 보면 '그래도 같은 민족인데 저런 표현은 너무한 것 아니냐'라는 부정적 반응, '재밌네'라는 반응, '나쁜 놈들을 나쁘다는데 뭐가 잘못이야 이 빨갱이들'이라는 반응 정도가 있지 않을까 싶다. 작은 일에도, 특히 국가의 이름이 걸린 일에는 너도 나도 투사가 되길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에 뭐 이상할 것도 없다. 덕분에 MX는 제대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 셈이다. ㅎㅎ


만약 MX라는 신문이 어떤 신문인지 알고있다면 그냥 웃어 넘기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까 싶다. 브리즈번에 살면 누구나 거리에서 쉽게 접하게 되는 소위 무료 신문 MX는 호주 출신의 세계적인 미디어 황제 머독이 소유한 뉴스코프가 소유한 브리즈번 내 타블로이드 신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타블로이드는 MX의 판형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콘텐츠에 대한 의미이기도 하다. 흔히 황색저널리즘이라 불리는 선정성 강한 기사들의 집합이 MX인 것이다. 늘 거대한 사진이 1면을 장식하고, 그 이후 면도 수 많은 연예인, 스포츠 스타, 길거리 일반인들의 사진들로 도배를 하는 신문이다. 뭐, 그러니 이런 신문에 대고 "아무리 북한이 나쁘다지만 일개 국가인데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 아닌가"라고 말하면, 이 신문은 한 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던 답을 할 것이다. "아 놔, 웃자고 던진 거에 죽자고 달려드네" ^^;


브리즈번에 대표적인 지역 신문이 (흠, 개인적인 의견일수도) MX를 포함하면 총 세 가지다. 아마도 가장 많은 부수를 자랑할 커리어메일(Courier Mail)과 브리즈번타임즈(Brisbane Times)다. 언론에 별로 관심이 없다면 브리즈번 타임즈 보다 씨티 뉴스가 더 유명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다 ㅎㅎ 그럼 할 말 없다 ㅋ 둘 가운데 커리어메일은 역시 머독이 소유한 뉴스코프 군단이다. 그렇다면 역시 타블로이드인가?? 나는 이를 '있는 척 하는' 타블로이드라 부른다. MX처럼 대놓고 선정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지만, 소위 언론 좀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뉴스의 엔터테인먼트화'의 전형이라 보면 된다. 반면, 브리즈번타임즈는 뉴스코프의 경쟁사라고 할 수 있는, 그나마 호주에서 언론이라 부를 수 있는 페어펙스 미디어의 신문이다.


타블로이드가 나쁘다 좋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적어도 학교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MX는 당연한고) 커리어 메일도 타블로이드임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어떤 신문이 타블로이드인지 인식하고 보는 것과 그런 인식 없이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에도 소위 대형 언론 가운데 이런 '점잖은 타블로이드'가 많지 않은가 싶다. 그리고 보통은 그 점잖음에, 그리고 '정론지'라는 그들의 주장에 묻혀 타블로이드란 사실이 잘 인식되지 않는 것 같다. '진보 vs 보수 언론'이라는 현존하는 구도가 아니라 '정론 vs 타블로이드'라는 구도가 되길 기대해 본다. 제 몫 찾아주기 운동이었던가^^

Posted by 세월부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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