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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8.25 검사장과 영주권자?

얼마 전 뉴스에서 "검사장 급 검사"에 관한 이야기를 보았다. 검찰청 조직은 검찰총장과 검찰로 이원화 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검사장"이나 "검사장급"이란 표현이 언론 등에서 관행적으로 널리 쓰인다고. 법적 근거도 없다는데, 여전히 검사장급 검사는 비공식적으로 차관급 예우를 받는다고한다.   


어느 조직이나 사회에서도 이처럼 구별짓기 관행은 존재하는 것 같다. 이민자의 나라인 호주. 코카시안 호주인들의 눈에는 다 똑같은 외국인처럼 보이겠지만, 한인들 사이에는 "검사장급" 검사들 처럼 나름의 위계가 존재한다. 그 위계의 최상층에 소위 "영주권자"로 불리는 이들이 있다.


https://pixabay.com/en/passport-document-traveling-576913/


어느 나라나 그렇지만, 외국인이 일정기간 그 나라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비자라고 불리는 이민 서류가 필요하다. 호주에도 관광비자, 학생비자, 단기숙련 비자 등 여러 종류의 비자를 소지한 한인들이 체류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영구거주 비자 소지자는 영주비자 소지자라 부르지 않고 영주권자로 부르는 관행이 있다. 


검찰의 꽃이라는 검사장이 되기 위해 많이 검사들이 노력하는 것 처럼 호주에 체류하는 많은 이들이 비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영주비자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난 10년 동안 내 주변에서도 그 "꽃"을 얻기 위해 몇 년을 고생하다 갑작스럽게 변경된 이민법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한국행을 택한 분들이 적지 않다.


소수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호주에서의 임시 노동이나 학업이 영주비자 획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내 주변을 보더라도 그 비자를 받기 위해 한국에서 받은 대학졸업장보다 더 낮은 학위를 다시 받고, 본인의 전공이나 경력과 관계 없는 분야에서 몇 년 씩 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처럼 쉽지 않은 길을 걸어 마침내 얻은 비자이니 그 성취감은 두 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주권자"라는 관행적 표현은 고생 끝에 비자를 다른 임시거주 비자와 구별짓고 싶은 욕망의 발현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비자를 받기위한 개개인의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런데, 이런 구별짓기에 대한 욕망은 앞서 말한 것 처럼 이곳에 체류하는 이들 사이에 가상의 위계를 만들기도 하고, 그 위계를 공고화하기 위한 여러가지 담론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호주 거주 한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인터넷 카페에 어떤 회원이 올린 웃픈 일화가 있다. 글쓴이가 어떤 커피숍에 갔는데, 옆 테이블에서 한국인들이 호주내 한인들의 위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내용인즉,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는 노비, 학생비자 소지자는 평민, 457비자 소지자는 6두품, 영주비자 소지자는 진골, 시민권을 취득한 이는 성골이라고. 


물론, 현실에서 "너 노비, 나 진골" 이러는 경우는 없지만, 이런 가상의 위계에 기초해 상대방을 평가하고 관계를 맺는 등의 일은 비일비재하다. 내가 "평민" 시절, 막 "진골"로 올라선 지인은 내 앞에서 "워킹 온 애들한테 잘 해줘봐야 1년 지나고 가버리면 남는 것도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곤 했다. 나와 별 허물 없는 사이였고, 내 비자는 워킹홀리데이 보다 훨씬 긴 4년이라 별 거리낌이 없었던 것일까? 물론, 그 말이 그다지 편치는 않았지만, 1년 후면 소원해지는 인간관계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 정도로 생각하고 넘겼다.


'영주권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때가 되면 받겠지'라고 자못 대범했던 어떤 지인은 주변인들이 하나 둘 영주비자를 받는 모습에 초조했는지 어느날 갑자기 RSMS(지방후원 영주비자)를 받겠다며 두 시간 남짓 거리의 작은 지역으로 떠나버렸다. 나중에 비자를 받고 나서 말하길 본인만 영주비자가 없으면 함께 못 만날 것 같아서 그리 했다고. 그 때도 계속 학생비자 소지자였던 나는 뭔가 아리송했지만, 그 이후로 그 지인과의 만남이 뜸해진 걸 보면 무슨 의미였는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ㅎㅎ


한인 커뮤니티에서 광고를 보면 종종 "영주권자 이상"이란 표현이 나온다. "영주권자 이하"의 존재를 염두에 둔 이 표현 역시 가상의 위계를 잘 보여준다. 특정 비자의 보유 여부를 묻는 것이라면 단순히 "영주권 보유자" 정도로 해도 좋을 것을 굳이 "이상"이란 표현을 통해 사람을 이상과 이하로 나누는 것은 뭔가 슬프지 않은가? 이정도면 누군가는 나를 '프로 불편러'로 부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비자 문제로 국내 추방될뻔 한 한인 가족에 대한 뉴스가 호주내 한인언론에 실린 적이 있다. 각종 이민사기로 인해 영주 비자를 받지 못하고 호주에 오래 거주한 가족인데, 이민장관에게 보낸 청원이 두 번이나 거절되어 한국행을 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지역 국회의원과 교회의 노력, 그리고 교민을 포함한 시민들의 청원으로 한 번 더 심사를 받게 되었고, 마침내 영주비자를 받게 되었다는 뉴스였다. 그런데 이후 호주 한인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이 가족들의 행동을 '법과 규정을 초월한 언론플레이의 성공'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댓글들이 여럿 올라왔다. '고생해도 못 받는 사람도 널렸는데, 본인들 잘못으로 못 받은 것을 언론플레이를 통해 떼를 써서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 호주 교민사회에 존재하는 가상의 위계와 그 위계의 상층부에 다다른 이들의 사다리 걷어 차기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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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세월부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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